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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0건 조회 1,561회 작성일 11-04-1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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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댜오위다오(釣魚島)와 독도(獨島)


                                                                        서봉성 논설위원/
                                                                        제주산업정보대학 한중교류통역과 교수


            댜오위다오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약 300㎞, 타이완에서 약 200㎞ 떨어진 동 중국해 남쪽에 있는 무인도로, 5개의 작은 섬과 3개의 산호초로 이뤄져있다.

            중국에선 댜오위다오췬다오(釣魚臺群島), 일본에서는 센카쿠열도(尖閣列島)라 부르며, 국제적으로는 센카쿠제도(諸島:Senkaku islands)라 칭한다. 중국측은 1873년에 출판된 지도에 중국 영토로 표시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 측은 1895년 오키나와현에 정식으로 편입된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현재까지도 빈번한 영토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본격적으로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타이완과 일본 어부들 사이에 고기잡이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면서 1971년 중국과 타이완이 각기 영유권을 주장하고, 이듬해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이 섬들은 소리 없이 일본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1978년 중국어부들이 이 지역에서 조업을 하자 일본 극우단체가 이곳에 등대를 설치하면서 분쟁은 격화됐다.

            결국 중국은 타이완과 공동대응을 천명하고 1992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이 지역을 영해에 포함시킨 뒤 이듬해 인근 해역에 해저유전을 시추하고 대규모로 항의 어선단을 파견하자 일본은 경비정을 보내 중국의 해양조사선을 강제퇴거 시키는 등 분쟁이 계속되었고 양국이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독도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성종실록, 숙종실록 등의 문헌에 의하면 조선 전기부터 우산도(于山島)또는 삼봉도(三峰島)로 불리면서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속해 있었다. 정조실록을 보면 이 섬 주변에 가제(강치:sea-lion)가 서식하는 고로 1794년경부터는 가지도(可支島)라 불렸는데 조정은 울릉도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시행, 한동안 무인도가 되었다. 1881년부터 조정은 개척령을 발하여 강원·경상·전라·충청도민을 이주시켜 개발을 시작한 즉, 이로서 독도 역시 울릉도 어민들이 하절기 어업기지로 이용되게 되었으며 이 때 부터 독도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명칭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이 보고서에 기록함으로써 최초로 문헌에 나타난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명백히 해주고 있고 또한 포츠담선언에 입각한 연합군의 지령(指令)도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한편,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초기 어민들이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종래 그들이 다케시마(竹島)라 부르던 울릉도를 마스시마(松島)로, 마스시마로 부르던 독도를 다케시마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일부 일본인들은 1894년까지도 여전히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칭했다한다.

            최근 일본교과서 왜곡 실태를 접하고 분노보다는 일본의 지성이 그 정도인가하고 쓴 웃음이 나왔다. 다음은 일본인 사카기바라 에이스케가 저술한 ‘일본은 몰락한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협량한 내셔널리즘, 이데올로기 외교로는 실패한다…종군위안부 문제가 그 전형이다. 2007년 7월 미국하원이 일본은 종군위안부에 대해 사과하라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당초 결의문 제출 당시에는 별 정치적 이슈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워싱턴포스트에 대대적으로 반박광고를 냄으로써 미 의회를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종군위안부든 난징학살이든 존재 자체를 부인하려해 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전 세계에 이해를 받지 못하는 내향적 주의·주장만 고집한 결과다.”

            그래도 필자와 집사람은 쓰나미로 비통에 잠긴 일본인들을 위해 성금을 보냈다. 어쩌겠는가. 우리네가 아주 예전엔 그네들보다 월등히 앞섰던 문화선진국이었는데…그때처럼 도와줘야지.

            2011/4/14-제주일보-서봉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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