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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의 이해 7] 교역항의 개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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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69회 작성일 23-10-13 12:09

            본문

            교역항의 개발, 두번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봅니다.


            5. 아산만 지역


            아산만 지역은 해로를 통하여 한강 및 예성강과 곧바로 연결되는 곳으로 대동강과 황해도 연안에서 바다를 통하여 남하하면 가장 먼저 도달하는 후미이다.

            이 후미 내에 마한의 교역항이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위치는 안성천과 삽교천 강안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인근의 천안시 직산면에 마한(馬韓)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目支國)이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목지국의 위치는 익산, 공주, 직산, 인천 등 여러 견해들 이 있으나, 근래의 학계 동향은 직산설에 많이 찬동하고 있다. 직산은 한때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의 소재지로 알려져 왔다.  

            지금은 하남위례성의 소재지가 한강 남안에 있었던 것으로 인정되므로, 직산 일대는 백제의 초기 도성이 아니더라도 이곳 이 옛날의 국도(國都)로 구전되어온 정황으로 보아, 목지국의 소재지로 비정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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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시대 지도, 사진: 김포신문] 



            다만 직산에서 아직까지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미흡한 점이라 하겠으나, 인접한 천안시 청당동 유적과 두정동 유적에서 초기철기시대 및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된 것이 참고되며, 이 유적들은 넓게 보아 직산과 동일한 문화권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히 청당동 유적에서 출토된 18점의 중국 대륙 남부산 청동제 대구(帶鉤)는 아산만을 통한 교역의 결과물로 보인다. 

            아산만의 안성천 입구 남쪽에는 고려 초기에 12조창 중의 하나인 하양창(河陽倉)이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에 설치되어있었다.  

            이것은 안성천 일대가 곡창지대로서 이를 기반으로 고대에도 교역이 활성화 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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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양창이 설치되었던 팽성읍 노양1리 경양포(2002), 사진: 평택신문] 



            6. 금강 유역 

            부여와 익산을 중심으로 한 금강 유역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어 이른바 금강유역문화권으로 설정되기도 하였다. 

            부여 송국리, 연화리, 구봉리, 검복리, 수목리 등을 비롯하여 익산 오금산, 다송리, 용제리, 평장리 등에서 비파형동검, 세형 동검, 동모, 동경 등 많은 청동기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이 지역이 청동기문화의 중요한 거점 중의 하나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에서 중국제 백자와 청자 그리고 남조 양나라의 오수전이 출토되었으며, 여기에서 발굴된 목관 재료는 일본에서 수입된 금송(金松)으로 밝혀졌다. 또한 부여 부소산성과 그 주변에서는 중국제 흑자, 백자, 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금강변 교역항을 통한 백제와 중국·일본 간 교역의 결과물일 것이다.

            익산 지역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건너와 정착한 곳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익산시 왕궁면 평장리에서 BC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제 동경이 출토된 것은, 한사군의 설치 전후에 이 지역과 한 군현 혹은 위만조선과 해로를 통한 교섭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익산에는 3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 시기에 마한 54국 가운데 하나로 건마국(乾馬國)이 있었다. 또 7세기 백제 무 왕대에는 이곳 금마면 기양리에 미륵사 그리고 왕궁면 왕궁리에 제석사 등 거대한 사찰이 건립되고, 왕궁리에는 궁성이 건립됨으로써 수도에 버금가는 곳이 되었다.  

            왕궁리 궁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마한의 도읍지, 백제 무왕의 별도(別都), 안승(安勝)의 보덕국(報德國) 등 다양한 학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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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의 옛지도, 사진: ko.wikipedia.org]​ 



            어떻든 간에 고대의 익산 지역은 해외와 문물 교류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그 주요 통로는 이 부근 수로여건으로 미루어 볼 때 금강변 포구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금강 유역의 백제 교역항으로 대왕포(大王浦)와 기벌포(伎伐浦)가 나타난다.  

            대왕포는 무왕이 신하들과 함께 놀았다는 곳으로, 부여읍 남쪽 금강변에 위치한 포구이며, 현재도 부여읍에 왕포리와 왕포천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소정방이 백제의 의자왕과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끌고 갈 때 사비에서 출항하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백제 유진장 유인원도 사비에서 군사들을 선박에 태워 출발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대왕포가 사비시대 백제의 중심적 교역항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해양사 측면에서 볼 때,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것은 금강의 원활한 수로 여건을 감안한 교역항의 확보 차원이었을 것이다.

            기벌포는 금강 하구의 장항읍 장암리에 위치한 포구이다. 웅진·사비시대에 서해안을 남하하여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반대로 항해할 때는 반드시 들러야 될 포구이다.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공격할 때 이 포구에 이르러 백제군과 싸워 이긴 후 강을 거 슬러 올라간 바 있고, 신라의 사찬(沙湌)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당나라 수군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삼국통일전쟁을 종결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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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벌포 해전과 김시득 장군, 사진: ilovesea.or.kr] 



            그러므로 기벌 포는 중간 기항지 역할을 수행하였던 백제의 교역항이라 할 수 있다. 금강 하구에 위치한 익산시 지역에도 웅진·사비시대 백제의 교역항이 개발되었다. 웅포면 웅포리 및 입점리와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에서 5세기대 백제 고분이 발견되었고, 

            특히 입점리에서는 5세기 중반 혹은 후반에 제작된 중국 청자가 출토되어 이 지역이 해로를 통 하여 중국과 교역하였던 곳임이 드러났다. 또한 입점리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어 이 지역 에 거대 세력의 존재가 확인되고, 이 세력들의 교역 통로는 수로 여건상 금강변 웅포로 보인다. 

            웅포는 금강 하구의 넓은 강폭이 상류로 올라가면서 갑자기 좁아지는 요충지이며,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도 그 명칭이 나타나는 것은 포구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외에도 금강변에는 삼국시대 이전에 여러 포구가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은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조선 초기의 포구들을 통해서 그 정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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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전라도 서해안

            원삼국시대에 곰소만의 부안군 지역에 항양선의 중간 기항지가 개발되었다.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3〜7 세기 마한·백제·가야·왜의 토기와 더불어 중국과의 교역품으로 보이는 동진의 청자가 출토되었던 것이다. 

            죽막동 유적 바로 밑에는 호남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서해의 큰 바다와 바로 연접한 포구로서 격포가 있다. 고대에 격포는 이 부근을 항해 하는 선박이 반드시 들러야할 해양지리적 조건을 갖춘 포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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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막동 유물-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출토 토기와 석제모형, 사진: 한국일보] 



            영광의 칠산바다와 금강 하구를 남북으로 오갈 때, 혹은 곰소만 깊숙이 위치한 보안면 포구에서 서쪽 외해로 빠져 나가고자 할 때, 해상 상태가 좋지 않으면 선박이 피항해야되는데 격포는 그 길목에 위치한 안전한 피항처였다. 

            조선시대에는 요해처로서 격포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640년에 이곳에 수군진이 설치되었다. 고대의 선원들은 서해 연안을 항해 하는데도 풍파를 두려워하였다. 해외에 가는 사신선 이외에는 대부분의 선박이 별 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1747년에 호남 양전사(量田使) 원경하(元景夏)의 상소문에 “칠산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숙련된 선원이라 하더라 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經七山危險而泊格浦 則舟人瀝酒相賀其 得生 離格浦而向七山 則雖長年三老 莫不憂其死)”라고 하였다. 

            이러한 위험 때문에 고대에 이 부근을 항해하는 선원들은 격포에 정박하여 죽막동 유적에 올라가 항해 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8. 영산강 유역

            영산강 상류에 고대의 교역항이 있었다는 문헌 근거는 없다. 그러나 나주시에는 1,212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고, 수백기의 고분이 영산강 회랑지대 곧 나주시 반 남면과 영암군 시종면을 중심으로 나주시 공산면, 동강면, 다시면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고분은 3세기 말에서 6세기 초까지 유행된 옹관 고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반남면 신촌리 고분에서는 금동관도 출토되었다. 

            이것은 고대에 영산강 유역에 인구가 밀집되고 또한 강력한 세력의 존재와 더불어 영산강 수로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특히 자라봉 고분으로 불려진 시종면 태간리의 전방후원분은 그 묘제와 출 토 유물에서 왜계 요소가 발견됨으로써 일본열도와의 해상을 통한 교류가 인정된다. 

            그러므로 이 부근 영산강 연안에는 이미 백제시대에 교역항이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문헌 기록은 나말려초 이후에 나타난다. 

            나말려초에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선사들이 영산강변의 회진 포구에 도착한 사례는 [표 2]와 같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사례로 보아 회진은 이미 통일신라시대 이전 부터 교역항으로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에 위치한 회진토성의 축조 연대가 6세기 후반 혹은 통일신라시대로 나타나는 것도 그 가능성을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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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회진성 시굴, 사진: 나주신문] 



            이 외에도 고려가 국가 제사를 지냈던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의 남해신사(南海神祠) 포구(남해포), 왕건 함대와 일전을 벌이기 위하여 견훤이 함대를 거느리고 출항하였던 영암군 덕진면의 덕진포가 영산강변에 위치한다. 

            또 문헌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의 상대포(上臺浦)도 5세기 초에 왕인 박사의 도일 항구로 구전되 어 오고 있다. 

            이들 포구 가운데 특히 남해포는 반남면과 시종면에 분포된 대형 고분 세력들의 교역항으로 이용되었을 수도 있다. 그 고분들은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 유역에 밀집되어 있고, 남해포는 삼포강 하구에 위치한 포구이다. 뿐만 아니라 남해신사 유적 의 발굴 결과 1세기에서 4세기로 추정되는 주거지가 발견된 것도 남해포가 고분 세력 들의 교역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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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전라도 남해안·제주도 지역

            해남반도의 서남쪽 연안에 위치한 백포만은 해남군 현산면과 송지면에 걸쳐있는 후미이다. 이 백포만이 원삼국시대에 교역항으로 이용되었다. 백포만 연변의 송지면 군곡리 패총에서 왕망시대(9~23)에 제조된 화천(貨泉) 1개와 역시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복골(卜骨)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1세기 때 군곡리와 중국 간에 해로를 통한 교역이 행하여졌던 물증이며, 그 교역의 통로는 낙랑이었다. 이 외에도 백포만 연변에는 두모 패총, 대인동 패총과 일명 죽금성이라 불리는 고대 성곽시설도 있어서,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곳 이 인구 밀집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대의 교역항으로서 번영을 누렸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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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곡리 패총 유물, 사진: MBC] 



            실제로 백포만은 이 부근 연안항로의 길목이자 병목지대인 명량수로의 남쪽 입구에 위치하며, 조류를 타고 서해 남북으로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곳이다. 해남반도의 동쪽 북일면 해안에도 백제시대에 교역항이 개발되었다. 

            간척되기 전에 이곳 내동리, 방산리, 용일리, 신월리 지역은 반도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좁은 반도에는 성마산 등 3개의 토성 유적과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고분들이 분 포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에 여기가 인구 밀집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방산리의 전방후원분과 내부 석실벽의 붉은 칠은 이 지역과 일본열도 간에 있었던 교류의 흔적을 보여준다.



            강진의 탐진강 하구에도 백제시대에 교역항이 개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 진구(神功) 49년 기사에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군대를 서쪽으로 이동하여 고해진(古奚津)에 상륙하였다 했는데, 이 고해진이 강진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

            또 탐진이 탐라와 연관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고, 탐라는 5세기에 백제에 예속되었으므로 백제와 탐라와의 교역항으로 탐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탐진은 『동국여지승람』에 강진의 구십포라 하였으며, 현재 위치는 강진읍 남포이다. 

            고흥반도 동남방 해창만에도 백제시대에 교역항이 개발되었다. 해창만 해변이었던 포두면 길두리 안동 마을 고분에서 금동관, 금동신발, 철제 갑옷 및 투구 등이 출토된 것이다. 이것은 5세기경에 안동 고분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거대한 세력이 존재하였음 을 의미한다. 

            해창만은 현재 간척되어 내륙으로 변하였지만 과거에는 큰 만이었고, 안동 고분은 그 해변에 위치한 해양 세력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여기에 교역항이 개발되 고 남해안 해로를 통한 교역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안동 고분의 동북쪽 건너편 해창만 입구인 영남면 금사리에 조선 초기에 사도(蛇渡) 수군첨사진이 설치된 것은 이 부근 항로의 요충지로서 해창만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수반도에서 청동기문화 유적과 유물이 집중 발견되었다. 여수반도에는 구(舊)여수시에 91기, 구(舊)여천시에 422기, 구(舊)여천군에 464기로 도합 977기)의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청동기시대에 이곳이 인구가 집중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여수반도 동단의 적량동, 오림동, 평여동, 월내동 등의 지석묘에서 현재까지 무려 16점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됨으로써 이 지역이 한반도 남부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적량동 지석묘에서는 비파형동검과 동모 8점이 무더기로 출토되었고, 월내동 상촌 지석묘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큰 43.4㎝ 길이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 지역에 강력한 정치적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월내동과 적량동, 평여동 유적은 여수반도 동쪽끝 광양만 해변에 위치하며, 남해 연안항 로의 길목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 유적의 세력이 해양을 매개로 활동한 것이 감 지된다.


            고고학계에서도 비파형동검문화가 BC 7~6세기에 서해안을 따라 전라남도 남해안 지역으로 들어왔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고, 전라남도 남해안 지역의 지석묘에서 발굴된 유병식(有柄式) 석검이 경상남도 남해안 지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여수반도에는 청동기시대에 교역항이 개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시 산지항(제주항)도 원삼국시대에 국제교역항으로 개발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제주도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전에 주호(州胡)라는 명칭으로 나타나며, 주호 사람들은 선박을 타고 한(韓)에 왕래하며 무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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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지항(제주항)의 과거와 현재, 사진: 제주일보] 



            이것은 제주도가 3세기에 본토와 해상 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이보다 시기가 더 앞선다. 산지항에서 1세기 왕망시대의 중국 화폐들로 오수전 4매, 화천 11매, 대천오십(大泉 五十) 2매, 화포(貨布) 1매 등 총 18매가 일괄로 출토되었던 것이다. 

            또 근래에 북제주군 애월읍 금성리 패총에서도 화천 2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화폐는 제주도와 육지 간에 해로를 통한 교역의 흔적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들이다. 산지항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오수전 980점이 여수 거문도 해역에서 무더기로 인양된 바 있는데, 

            이것은 남해안 연안항로를 따라 왕래하던 무역선이 폭풍을 만나 거문도에 난파하였던 결과물이다.


            ​[자료출처: 한국해양재단 해양교육포털 한국해양사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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